보라색 히비스커스 자치마만다 응고지아디치에출판 민음사 출시 2019.06.18.
아버지 없이 자랐다.
어머니는 이혼하고 나를 혼자 키우고 재혼했으나 계부는 어머니를 잘 때렸다.
술을 마신 밤에는 신발로 어머니의 목을 밟고 삽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은 마당에 낫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새 아빠가 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아빠가 없었다.
아침이 빨리 오기만을 기원하며 지냈지만 그런 저에게 아버지가 있어서 곧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이었다.
아닌 신에서도 만들어 내야 했다 밤에 나를 지키고 주고, 같이 하고 준 아버지는 하늘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나는 신앙심이 좋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신앙의 색이 단색 그런데 성장했다.
기독교 중에서도 “뼈 그런데 보수”라고 불리는 낡은 신에서 자랐다.
중학교 때 세상 유혹이라고 생각하고 즐기던 노래방을 주저 없이 끄고, 일요일의 성수기 때문에 시험 공부를 하고 있어도 12시가 되면 신데렐라처럼 책장을 제대로 내렸다.
일요일에 간식을 못 먹는 것은 기본이고 예배 시간에는 반바지만 금지였다.
지금 생각하면,”사탄의 음악”이라는 누명을 쓰고 쓰레기 통으로 직행한 소테지와죠ー지, 윈스턴은 얼마나 억울했을까. 14세 저는 기꺼이,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순종했다.
그분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분의 기쁨이 되고 싶었으니까. 고교, 대학에 들어 신앙심은 흔들리기는커녕 견고했다.
배우고 확신한 데 따른. 혼전 순결을 서약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주는 대로 낳으면 손을 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분의 뜻에 따르겠다고 노력했지만 나는 벌레만도 못한 죄인임을 고백했다.
커지고 시작된 자위 행위를 기도회 때마다 울면서 후회했다.
뭔가가 탐 나서 자신을 꾸미고 싶고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러운 욕망 자체에 죄책감이 맺혔다.
“보라 색 히비스카스”유진은 가부장적 폭력적인 신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종교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천부의 정서적 폭력을 쓰고 싶었다.
적지만, 아직 저에겐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신중하다.
폭력에 오랫동안 익숙해진 사람의 심리 묘사 때문에 읽으면서 가슴에 돌이 실린 듯했다.
“내가 당신에게 하는 것은 모두 당신 때문이다”폭력 뒤에 사랑한다는 말 때문에 아이들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폭력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옷을 입으면 우리는 얼마나 혼란하는가. 어린 시절 나를 지켜서 주고 나를 사랑하는 신의 진리가 나를 얼마나 억압하고 죄책감을 조종한 것? 그러나 그의 “사랑하는 “다는 목소리가 있었기에 나는 어린 시절을 겪은 것 아닌가. 강 빌리는 숙모의 가족과 아마디 신부가 등장하고 보라 색 히비스카스도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이혼을 계기로 자신이 믿었던 세계가 붕괴한 것부터 시작했다.
벽에 균열이 생기고 담이 무너지다 바다가 보였다.
나를 30년 이상 지배하고 온 인생의 테두리 밖에도 다른 인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지했던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감각을 끌어올리는 것은 꽃꽂이가 아니라 길고 험한 길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느낌과 욕망을 보고 살아 본 적이 없어서 남이 주입된 감정을 자신의 것이라 받아들이고 나를 지우면서 살면서 한번에 될 리 없을 것이다.
인생은 그만한 이유가 있고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외롭게 깨달았다.
자기 세계가 무너진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는 사람들은 단정적이고 쉽게 말한다.
우리는 신에게 접근할 때 구원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다가올수록 구원을 되찾다.
우리의 눈이 높은 하늘을 쳐다볼 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굳은 땅에 발을 딛고 걸을 때, 정말 자유인이다.
우리의 존재는 마침내 눈을 뜬다.
붉은 히비스카스만 아니라 보라 색 히시비스카스도 있다는 사실에. 희소로 향기로운 자유를 포함시킨 다양함 속에서 흔들리며 걸어간다.
아아, 보라 색 히비스카스. 길을 잃고 깨어난 아름다움이야.